우리나라 잠업의 역사

양잠업양잠업

우리나라의 양잠에 대한 기록은 4300여 년 전으로 (단군세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경자 93년(기원전 2241년) 단군께서 버들 궁전에 살면서 백성들에게 누에치기를 장려했다.” “박혁거세 17년(기원전 41년)에는 6부촌을 두루 살피며 누에치기를 장려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 누에치기는 주나라의 기자(簊子)가 조선으로 옮겨와서 기자조선을 세울 때(기원전 1123년) 기자에 의해 전해내려왔다고 전하며, (한서지리지)에는 “簊子敎基民以禮儀田蠶織作”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적어도 우리나라 잠업은 약 3000년 전에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중국의 잠업이 기원 후 500년경에 유럽으로 전파된 것을 감안할 때 잠업은 우리나라에 매우 이른 시기에 들어온 산업이며, 현재 세계 최대 잠업국가로 알려진 일본은 기원후 200년경에 중국으로부터 우리나라를 거쳐 누에를 기르기 시작하였다. 삼한시대에는 양잠과 누에고치에서 실을 만드는 제사 및 비단을 짜는 견직 기술이 널리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이어지는 삼국시대에도 여러 왕들에 의해서 양잠이 권장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특히 백제의 5대 초고왕(166~214년) 때에는 양잠법과 비단 직조법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양잠업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918년 고려태조 왕건에 의해서 뽕나무 심기와 누에치기를 권장하였다는 기록 등 여러 왕들에 의해서 양잠이 장려된 기록이 남아있다. 고려시대에는 양잠의 풍요를 기원하는 국가적인 의식으로 매년 늦은 봄, 길한 사(巳)일에 선잠제를 거행하였는데, 이 때 선잠 서능씨의 신위를 모시고 최초로 지낸 의식이었다. 그러나 고려시대는 국가에서 양잠을 보호하는 엄격한 제도가 없었고, 고대에서부터 이어진 계급에 따라 의복의 직물을 사용하는데 제한을 받았던 시대였다. 즉 비단으로 만든 옷은 왕족이나 귀족들만이 입을 수 있도록 엄격한 복식제도에 의한 규제를 받았던 시대로 비단의 생산력은 저하되고, 중국의 명나라로부터 비단을 수입해야 될 정도로 양잠산업이 육성되지 못하였던 시대이다.

조선시대에는 비단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면서 중국에서 비단을 수입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제도로 양잠을 권장하였다. 태조는 ‘종상지법’을 제정하였고, 태종은 ‘공상잠실법’을 제정하여 양잠을 적극적으로 권장하였으며, ‘후비친잠례(后妃親蠶禮)’를 거행하도록 하였다. 세종대왕은 언문으로 양잠서를 보급하였고, 세조는 ‘종상법(種桑法)’이라는 법령을 공포하여 농가의 규모에 따라서 일정한 양의 뽕나무를 심게 하고, 기술도서를 편찬함으로써 우리나라 양잠업의 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성종 8년에는 ‘왕후 친잠례’가 거행되면서 궁궐에서 누에를 치는 행사가 시작되었다. 국가차원에서 여러 가지 제도와 의식으로 양잠업을 장려하였으나, 1876년 개화기를 전후하여 비단의 소비급증에 따른 수입이 불가피 하게 되었다. 이후 양잠권장을 위한 기구 설치, 법령 제정, 관련 서적 편찬, 기술 보급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양잠업은 전근대적인 형태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양잠업의 장려를 위하여 동서남북의 사방에 뽕밭을 조성하고 누에를 기르는 잠실을 두었다. 동잠실(현재서울의 잠실 일대), 서잠실(연희동 일대), 남잠실(밤섬), 선잠단(성북구 일대)으로 나누어 잠업을 장려하였으며, 이 잠실에 뽕나무가 무성해야 태평성대를 이룬다고 믿었다.

근대의 우리나라 잠업

잠업관련서적들

1910년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하면서 우리나라의 환경이 누에를 기르는데 적지임을 알고, 일본에서 개량된 뽕나무와 누에씨를 도입하여 잠업의 개량과 장려에 힘을 기울였다.

잠업 장려 정책의 일환으로 각종 기구를 설치하고, 시설을 정비하며, ‘조선잠업령'이라는 법령을 제정하는 등 적극적으로 장려 정책을 시행하였으며, 1919년에는 전국의 각 도에 모범 잠실을 설치하여 일본이 식민지의 4대 수탈 정책 중의 하나로 삼았다. 그 결과 1939년에는 세계 제4위의 잠업국으로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과 1950년의 6.25전쟁은 양잠업의 쇠퇴현상을 가져왔다.

현대의 우리나라 잠업

현대의 우리나라 잠업2 현대의 우리나라 잠업1

1953년부터 정부의 강력한 장려시책으로 인하여 다시 뽕을 재배하는 밭이 늘어나기 시작하였으며, 수출증진과 농민소득증대사업을 목적으로 1959년부터 증산 5개년 계획이 시행되면서 1976년에는 사상 최고로 ‘누에고치 42000톤 생산’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일본과 중국의 국교 정상화로 인하여 중국 제품이 일본으로 대량 유입되면서 우리나라의 양잠산업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1980년대부터는 우리나라에도 중국에서 값싼 생사를 수입하여 국내에서 가공하는 산업으로 변화되면서 우리나라의 양잠산업은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에 머물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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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22-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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