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의 도자문화

扶安 鎭西里와 柳川里 一帶의 高麗 靑瓷窯址群은 12세기~13세기에 대단위로 窯場이 운영되던 곳으로 그 동안 全南 康津과 함께 高麗 中期의 대표적인 청자 요지군으로 널리 알려져 왔다. 부안지역의 청자는 품질에 따라 상품 청자는 왕실이나 귀족 등의 상위 계층에 공납이나 특수 주문용으로, 일부의 상·중품 청자는 관에 공납하였으며, 대량으로 생산된 중·하품의 청자는 민수용으로 공급되었을 것이다.

부안지역의 도자문화는 줄포만 건너편에 자리하고 있는 고창 용계리·반암리에서 만을 넘어 부안 우동리와 진서리로 전파되었으며, 고려 중기에는 진서리·유천리에 대단위의 요장이 설치되어 다양한 품질의 청자를 제작해 내었다.

그러나 부안지역에서는 고려시대의 청자뿐만 아니라 통일신라시대~고려시대의 도기, 조선시대의 분청자, 백자 등 전 시대에 걸쳐 우수한 품질의 도자기를 생산해 내었으며, 그 증거로 각 지에는 이와 관련된 가마터가 존재하고 있다.

그 예를 살펴보면 부안군 보안면 신복리에는 통일신라시대~고려시대의 도기와 기와를 제작했던 가마터가 여러 기 존재하고 있으며, 보안면 우동리에는 고려시대 조질청자, 흑유자기, 도기 가마터, 그리고 조선시대 15세기 후반 경에 제작된 인화·음각·박지·귀얄기법으로 물고기, 국화, 모란꽃, 연꽃 등의 다양한 문양을 나타낸 분청자, 문양이 없는 백자 가마터 등이 조사된 바 있다. 이외에도 부안지역에는 역사시대 도기, 조선시대 분청자, 백자, 기와, 옹기 등을 제작했던 가마터들이 도처에 존재하고 있어서 한국의 도자문화를 연구하고 이해하는데 중요한 지역임을 알 수 있다.

부안지역에 이처럼 여러 시대에 걸쳐 다양한 도자문화가 꽃피울 수 있었던 이유는 사회·문화적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지정학적 위치와 자연환경적 여건 등이 주요했으리라 판단된다. 즉『고려사』에 의하면 당시 줄포만 지역 중에서 부안의 保安은 고려 초에 南道의 水軍에 설치한 12倉 중에 한 곳(安興倉)이었으며, 제안포(=柳浦, 현재 유천리로 추정됨)는 고려시대 漕運에 있어 중요한 거점이었음을 보여준다. 또 진서리에는 ‘검모포진’이라 하여 군영을 두었으며, 고려~조선시대까지 수군의 요충지로서 입지를 점하고 있었다.

특히 부안 변산 지역은 국가가 직접 그 생산과 공급을 관장하는 형태로 목재를 조달한 내용이 문헌에 나타나 있어 주목된다. 즉 西材場이나 東材場은 궁궐 등 주요 건조물의 건설이나 수리에 필요한 양질의 목재를 안정적으로 조달하기 위해 설치된 직영 목재 공급지였음에 틀림없다. 변산 같은 곳이 그러한 곳의 하나였을 것이다. 변산은 궁궐 등에 쓰일 목재를 공급하는 국가의「材府」로서, 1199년에는 이규보가 掌書記로 있을 때에 이곳에서 벌목을 감독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변산에서 질 좋은 재목이 많이 생산되어 궁궐의 중수, 선박의 조성 등에 사용되어졌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따라서 요업에 사용 가능한 땔감도 풍부하였음을 짐작케 해준다. 그리고 제안포는 조운의 중요한 거점으로서, 완성된 자기제품을 해로를 통해 신속하게 수도 개경으로 운송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이 모든 요건들이 부안 지역에서 고려시대 이후 대단위로 요업단지가 조성되고, 활발한 생산 활동을 하게 된 배경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3세기 후반 경에 왜구와 몽고군의 침탈로 해안이 피폐화되고, 땔감 등의 자원 고갈로 인해 더 이상 가마가 운영되지 못하다가, 고려 말경에는 해안가인 줄포만을 떠나 인근의 정읍 등의 내륙으로 요장이 옮겨 갔다. 따라서 13세기 말~14세기에 제작되는 말기 양식의 상감청자는 부안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며, 정읍 지역에서 제작되어진다. 이 시기 이후 15세기에 들어서면 부안을 비롯한 전북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조선시대 분청자와 백자가 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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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22-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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