柳馨遠 시대 : 1622년(광해 14) ~ 1673년(현종 14)
유형원은 조선후기를 살았던 실학의 창시자이고 자는 덕부(德夫)이고, 호는 반계(磻溪)이며 1622년 1월 21일 외삼촌인 성호 이익(1681~1763)의 당숙인 이원진(1594-1665)의 집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계를 살펴보면 그의 선조들은 하정(夏亭)이후 대대로 서울에서 살면서 벼슬이 끊어지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 흠도 1616년(광해8)에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 說書)에 이르렀었다.
1623년(인조1)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이루어진 뒤에 예문관 검열(藝文館 檢閱)로 좌천되었다가 그해 7월 유몽인(柳夢寅)의 옥사가 일어나자 여기에 연루되어 구금되었으며 결국 그해에 매를 맞아 죽고 말았다. 이때에 그의 나이는 불과 28세였으며 반계가 2살 때의 일이었다.
이처럼 일찍이 부친을 여윈 그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자라서도 정치적으로 불우한 처지에 있었기때문에 벼슬길에 대해서는 뜻이 없었다. 1644년(인조22)에 조모의 1648년(인조26)에 어머니의 그리고 1651년(효종2)에 조부의 상을 만났으니 전후 8년 사이에 조부모와 어머니의 상을 당한 것이다. 상을 마치고는 1653년(효종4)에 온 가족을 이끌고 부안의 우반동으로 이사하였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32세였다.
그리고 1654년에 그의 조부의 유명(遺命)에 따라 진사시(進士試)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그 후로 다시는 과거에 나가지 않았다. 우반동은 지금의 보안면 우반이라 부르는 마을로 바다와 가까워서 생선을 자유로이 구할 수가 있었다. 그는 여기에서 문을 닫고 고요히 앉아서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였으며 날마다 일찍 일어나 가묘(家廟)에 절하였다.
그가 우반동에서 20년을 살면서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반계수록(磻溪隧錄)』이다. 그의 연보에 따르면 그가 부안으로 이사해 오기전인 1652년(효종3)에 집필을 시작하여 1670년(현종11)에 완성할 것이 이『반계수록』이다. 그러므로『반계수록』은 거의 전부가 부안에서 집필 된 셈이다.
『반계수록』은 모두 28권인데 그내용은 전제(田制), 교선(敎選), 임관(任官), 직관(職官), 녹제(祿制), 병제(兵制),속편(續篇), 부록(附錄)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 목록만으로는 제도에 관계되는 것 뿐이지만 실제로는 깊은 철학에서 나온 책이다. 이 책은 300여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도 높이 평가받고 있는데 반계 사상이 여기에 담겨져 있다.
그가 살던 그 시대는 정치적으로는 당론이 결심했고, 경제적으로는 임진․병자의 대란을 겪은 뒤라 민생이 도탄에 빠져있고, 사회적으로는 도덕이 무너져 있었다. 그는 당시 야당의 위치에 있던 남인으로 지목되어 관계에 나아가서 자기의 뜻을 펼수는 없었기에 우리 사회의 개혁을 실사구시(實事求是)라는 이른바 실학사상(實學思想)에 의하여 이루어야 한다고 믿었는데, 이것이 바로 퇴폐한 나라를 바로잡자는 구국운동이고도 했다.
비록 이 운동이 당시의 집권층에 의하여 묵살당했다 할지라도 성호 이익(星湖 李瀷),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으로 이어지는 실학은 유학사상에서 경제사회로의 전환을 도모하려는 몸부림이었던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남인 혹은 북인 이기에 벼슬길에서 멀어져 가는 양반들의 반동운동이기도 하였다.
유형원은 이런 실학의 선구자요 비조였다. 그 학문의 뒤를 이은 이익은 그의 저서인『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말하기를“국초 이래로 시무를 아는 이는 오직 율곡(栗谷)과 반계(磻溪)가 있을뿐이다”라고 평하였다.
그는 이『반계수록』외에도 정음지남(正音指南), 무경사서(武經四書), 여지전지(輿地全誌), 군현제(郡縣制), 이기총론(理氣總論), 논학물리(論學物理), 경설문답(經說問答), 기행일록(紀行日錄), 속강목의보(續綱目疑補), 동사강목조례(東史綱目條例), 동국역사(東國歷史), 동국가고(東國可考), 주자찬요(朱子簒要), 동국문헌(東國文獻) 등이 있다.
이와 같이 방대한 저술을 남긴 그는 1673년(현종14)에 병을 얻어 우반동의 자택에서 그의 나이 52세에 별세하였다.
- 부안군지 中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