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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

부안을 빛낸 부안의 인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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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의 인물 ‘김명’
金銘

시대 : 1545년(인종1) ~ 1619년(광해11)

자는 여신(汝新), 호는 화곡, 본관은 부안(扶安)이며 문정공(文貞公) 구(坵)의 후예이다.

주부(主簿) 경정(景貞)의 아들로 죽계(竹溪) 횡(鈜)의 아우이며 1545년(인종 1)에 부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그의 형인 죽계와 함께 학문에 정성을 다하였다. 그리하여 경서를 비롯하여 사기 제자백가(諸子百家) 등 통하지 않은 책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의 학명은 널리 떨쳐서 경향의 석학들과 교유하였다.

특히 그와 친교가 깊은 석학으로는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들 수 있다. 월사는 그의 학문을 아끼어 벼슬길에 나오기를 권하니 그는 서신으로 답하기를

『내 비록 용이 되어 하늘에 오르고 싶은 뜻은 있지만, 세상을 건질 재주가 없으니 어찌 하겠고(雖有攀龍意
奈無濟世才)』라고 하여 이를 정중하게 거절하였다고 전한다. 또한 이이(李珥)는 시에서 말하기를
『몇 달을 보지 못하니 가슴 속에서 인색함이 싹트네(不見幾時月 胸中鄙吝萌)
천경수에 마음을 씻으니 한가지로 도의 기틀이 맑아지네(洗心千頃水一樣道機淸)』라고 김명의 인품을 칭찬 하였다.

이 시로써 율곡(栗谷)과의 친분을 짐작할 뿐 아니라, 율곡이 그를 얼마나 아끼는가도 알 수 있다.

1605년(선조 38)에 그의 나이 61세가 되어서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으나 그것은 벼슬길에 나아가기 위함이 아니고 선비로서 사마시(司馬試)에 오르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기 때문이었다.

만년(晩年)에는 장성(長城)의 개암(介岩)으로 옮겨 살았다. 거기에서 후진을 가르치며 만년을 보냈는데 현주(玄洲) 조찬한(趙讚韓)도 근처에서 살았기에 둘이는 서로 학문도 강토하고 시국도 개탄하며 마음을 터놓고 사귀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는 편모를 모시고 있다가 상을 당하자, 그는 손수 어머니의 시신을 장성(長城) 제암(霽岩) 아래까지 업고 가서 거기에 장사를 모시고 3년간 시묘를 하였다.

이때에 재상 김헌국(金憲國)은 그곳을 찾아와서『효우는 지행하고 돈학은 장후하다(至行孝友 敦學獎後)』고 그를 칭찬하였다.

또한 정유재란(丁酉再亂) 중에 불탄 부안(扶安)의 향교(鄕校)를 1600년(선조 33)에 중건할 때 상량문(上樑文)을 지었으며 객사 부풍관(扶風館)의 상량문도 지은 당대 부안의 대문장가였다.

그는 1619년(광해 11)에 향년 75세로 졸하였는데 그가 졸한지 150년 뒤인 1768년(영조 44)에 그의 형 김횡과 함께 부안의 유천서원(柳川書院)에 향사하였다.

그의 유고인『화곡선생유고(火谷先生遺稿)』는 1915년에 간행되었는데 그 서문은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이 지었고 발문은 후손인 병술(炳述)과 수철(水喆)이 지었으며 내용은 2권 1책으로서 시(詩), 서(書)의 부록으로 되어 있다.

- 부안군지 中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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